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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1970년]]에 치러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이철승, [[김재광]] 등과 제휴해 김영삼을 40여표 차이로 꺾고 과반수선을 얻어 역전승,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1970년 [[1월 24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할 것을 선언하면서 '만일 71년 선거에서 또다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공원]] 유세에서 총통제 가능성을 다시 폈다. 이 유세로 인하여 뒷날,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사범으로 입건도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는 [[10월 유신]]이 발생하자 "이처럼 되었는데도 내가 선동가냐"며 반문하였다.<ref name="손세일"/>
         진산 파동이 수습되고 1971년 [[5월 25일]] [[대한민국 8대 총선|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한다. 유신 선포 직후 김대중은 [[고노 겐소]]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회견을 갖고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했으며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정력적인 반 유신 투쟁을 벌인다. 1973년 [[하와이 섬|하와이]]를 경유하여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대중은 [[조윤형]], [[김상현 (1935년)|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게 된다.<ref name="손세일"/> 3월 25일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 사회에서 강연 및 반정부 시위 활동을 벌인다. 초대 서울시장 [[김상돈]], [[미주민주국민회의]] 의장 [[임창영]], 전 [[한국신학대학교|한국신학대학장]] [[김재준]], 예비역 해군제독 [[이용운]] 등 교포 사회에서 활동중인 여러 지식인, 예비역 장성들과 뜻을 모은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에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초대의장에 추대된다. 7월 10일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 비록 8월 8일에 납치되긴 했으나 15일 결성된 한민통 일본지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를 규합하며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ref>《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ref><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96686 [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후광 김대중 평전</ref>
  • 김민기(가수)
         1974년 10월에는 [[카투사]]로 [[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으나 1975년 초 [[10월 유신|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결정은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전무했다.
  • 김성곤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한 나머지 1971년 민주공화당의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등과 함께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10.2 항명 파동]]'''을 일으켰다. 박정희 분노를 산 김성곤 회장은 [[길재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범죄)|고문]]을 당하고, 정계에서 쫓겨났다. 당시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뽑힐 정도로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시중에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서 생으로 변을 지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오죽했으면 신민당에서 문제삼으며 정권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3선 개헌 이후에 소위 4인체제의 힘이 커지자 기회만 보고 있던 박정희가 항명파동을 계기로 싸그리 숙청해버린 것이다. 집권당 국회의원도 박정희한테 반대하면 잡혀가서 개처럼 두들겨 맞는다는 것을 본 이후에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과 정권내에는 박정희한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완벽한 1인 독주체제가 된다. 이 때문에 노골적인 종신집권 의욕을 보인 [[10월 유신]] 때는 집권세력 내에선 전혀 반대가 없었다.
  • 박근혜
         1990년 잡지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5·16과 4·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역사 의식에 의문이<ref name="chung01"/> 제기되자 2007년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본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007년 7월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그는 '박 전 대통령 유지 계승' 역사의식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5·16은 구국(救國)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남북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공약에도 기아 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ref name="chung01"/>"는 것이다. 다만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판단유보를 내렸다. 5.16 뒤의 유신시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ref name="chung01"/> 는 질문에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ref name="chung01"/>"고 답하였다. 이 때문에 야당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 신기석
         [[1968년]] [[영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10월 유신]] 성립 후인 [[1973년]]에서 출마하며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도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국토통일위원장과 [[10·26 사건]] 이후 [[1980년]]에 조직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 육홍균
         1972년 제헌동지회 소속 전직 국회의원들과 [[10월 유신]]을 지지하였다.
  • 윤치영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신민당 (1967년)|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 [[1971년]] [[미국]]을 방문, [[고든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Doctor of Letters)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발표된 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그가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성토가 쏟아져나왔으나 곧 긴급조치 발표로 묻혀졌다. 이후 그는 각종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과 야당은 국익보다 권력욕에 눈먼 집단이라며 야당,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또한 일부 야당은 [[미국]]을 등에 업고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며 질타하였다.
  • 이기택
         === [[10월 유신|유신]] 시대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 부산 동래구 을] || '''[[신민당(1967년)|신민당]]''' || '''34,471 (65.89%)''' || '''당선 (1위)''' || 1972.10.17 자격박탈[br]([[10월 유신]]) ||
  • 이은상(시조시인)
          이후 이은상은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작성했고 1972년 10월 청우회 중앙본부 회장으로 있으면서 "무질서와 비능률을 배제하여 국기를 공고히 하려는 박 대통령의 영단에 적극 찬동한다"는 뜻의 '[[10월 유신]]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후 이를 옹호하는 관변단체 총력안보 국민협의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 이후락(전 국회의원)
         '''박정희의 책사, [[대한민국]] 최초 대북밀사, [[10월 유신]]의 주역'''
         또한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도 이후락의 작품이다. 그 직전까지는 비록 형식뿐이나마 야당의 견제기능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10월 유신]]으로 말미암아 한국 선정사는 다시 유사왕정시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10월 유신]]을 작업했던 곳은 궁정동 안가였으며,[* 작업 암호명은 풍년사업.]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는 나중에 이곳에서 미녀파티를 하다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이때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김기춘|바로...]][* 출처 :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typ_800=11&seq_800=10187567]
         방북에서 돌아온 후 [[김일성]]과의 대담내용과 [[청산가리]] 일화를 --언플-- 기자회견하면서 이후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후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 [[신직수]]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장관]] 등과 함께 [[10월 유신|유신]][[헌법]] 작업을 주도하면서 최고의 권력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해가 뜨면 언젠간 지는 법. 1973년 [[사망 플래그|박정희의 차기 후계자로 이후락이 거론]]되면서 --[[장성택|독재자는 2인자 따위 안 키운다]]-- [[윤필용]]과 관련된 군 인사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 터졌고 이것은 이후락에게 매우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언제 숙청될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었고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언제 또 갈굼을 당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뭔가 큰 건수가 필요했고 충성다짐식으로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 진헌식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에 반발하여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활동하였다.
  • 최형우(정치인)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김녹영]], [[김한수(1935)|김한수]], [[김상현(1935)|김상현]], [[나석호]], [[김경인]], [[조윤형]], [[조연하]], [[이종남(1919)|이종남]], 이세규, [[박종률]], [[강근호]], [[류갑종]] 등과 같이 모 군부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15선거구)[* 현 울산광역시 일대] || '''[[신민당(1967년)|신민당]]''' || '''47,046 (47.80%)''' || '''당선 (1위)''' || 1972.10.17 자격박탈[br]([[10월 유신]]) ||
  • 허화평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박정희]] 대통령과 [[10월 유신]]의 결과물인 산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첫 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51768&iid=1140067&oid=449&aid=0000114843&ptype=052|#]]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서 청산하지 않고 놔둔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결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서 수습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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